2024년 전 세계에서 속된말로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을 뽑는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접한 후 그녀의 책을 다시 꺼내보려는 용기보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이 한 문장을 읽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단지 좋은 문장이었다기보다, 누군가의 언어를 통해 나의 기억, 나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공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공감받는 글은 결코 우연히 쓰이지 않습니다.
작가의 소감문을 예시로, 공감받는 글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법’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생각을 멈추게 하며, 결국 마음속 깊은 곳을 여는 글에는 어떤 구조가 숨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1. 공감의 시작은 ‘작은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한강 작가는 수상 소감의 문을 이렇게 엽니다.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유년기의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평범한 순간에서 공감의 첫 불씨가 피어납니다.
비에 젖은 아이들, 처마 밑에 몸을 웅크린 모습, 맞은편에도 똑같이 서 있는 작은 군중.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 속 어느 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 역시 비를 피하던 그 순간이 있었다는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공감받는 글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됩니다. 작고 사소한 경험에서 보편적인 감정을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무게 있는 문장이나 오래된 철학보다, 하나의 구체적인 체험이 훨씬 강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습니다.
2. 개인의 감각을 ‘다수의 시점’으로 확장합니다
작가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이 순간 글은 다음 단계로 진화합니다.
개인의 깨달음이 타인의 감각으로 확장되는 순간, 독자는 더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비에 젖은 피부를 통해 나 자신의 감각을 떠올리고, 동시에 다른 이들의 삶에도 닿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감받는 글의 구조’ 두 번째 단계입니다.
나의 경험을 다수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힘.
이 지점에서 글은 더 이상 혼자의 것이 아니며, 독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글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3. 문학이 던져온 오래된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한강 작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제 글은 감각과 장면을 넘어섭니다.
존재에 대한 질문,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오래된 물음으로 향합니다.
이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독자가 ‘공감의 여정’을 따라온 끝에 만나게 되는 본질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좋은 글은 결국 질문을 향해 갑니다.
그 질문이 충분히 깊고 근원적일수록, 독자는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4. 도착점은 ‘역할’입니다 –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대답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글의 도착지에 도달했음을 알게 됩니다.
문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글을 쓰는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감받는 글은 목적 없이 감정을 쏟아내는 글이 아닙니다.
글에는 반드시 도착점이 있어야 하며, 그 도착점은 ‘내가 왜 이 글을 쓰는가’에 대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글이 나에게 필요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 공감받는 글의 4단계 구조, 정리하면
1단계 | 개인적 경험 | 작고 구체적인 장면으로 독자의 감각을 여는 시작점 |
2단계 | 시점의 확장 | 나의 경험을 다수의 감각으로 넓히는 확장점 |
3단계 | 근본적 질문 | 문학·삶·존재에 대한 오래된 질문으로 이끄는 심화점 |
4단계 | 역할의 선언 | 글쓰기의 이유, 문학의 위치를 밝히는 도착점 |
✍️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문은 단지 수상 소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문학적 글쓰기’였고,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좋은 글은 결국 우리를 멈춰 세우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왜 이 글을 쓰고 있나요?”
이 질문을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이 글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에 도착하나요?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있나요?
덧. 소감문 전문을 아래 함께 첨부합니다.
폐하, 왕실 전하,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자 20여 명의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촉촉이 젖은 비를 그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면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또 다른 마음 속 깊이로 들어가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을 실에 매달아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 그 실을 믿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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